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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깊이10

[구르미 그린 달빛] 김유정(홍라온)의 아버지는 어떻게 전설이 되었는가[홍경래의 난 2편]




                   




순조는 보위에 오른지 10년쯤 됐을 때부터 계속 병치례를 했습니다. 심지어 어머니께 문안 가는 것도 땀이나고 숨이차서 가기 힘들때가 있었는데, 그래도 각종 접견 자리는 다 나아갔고, 정사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던 중 순조 11년 12월 20일에 평안도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적도가 일어나 가산 고을을 점령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이어서 급보가 올라는데 선천, 곽산, 용천, 철산이 점령되고, 정주성에서는 하리들이 성문을 직접 열어줬다는 내용입니다. 그 반란군의 수장은 홍가라고 했습니다. 양반이긴 한데 변방의 장수도 아니고, 유력한 가문이 아닌 일개 촌부로 당시 영부사 이시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좌의정 김재찬은 좀더 심각하게 보고 서북지방 군사만으로 힘들 수도 있으니 경군을 선발하라고 주청을 올립니다. 그래서 순조는 훈련원, 금위영, 어영청의 기마병과 보병 일부를 정예 쥐주로 선발해서 며칠 안에 출발하게 했습니다. 수백명의 최정예부대가 급파된 것입니다.  

이 난의 주모자가 바로 라온이의 아버지 홍경래입니다. 어제 대동여지도를 봤는데 처음에 김정호가 왜 제대로 된 지도를 그리기 위해 인생을 다 받치는지 그 어렸을 때 장면이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잘못된 지도 때문에 겨울에 산에서 죽은 겁니다. 그런데 겨울에 산에 들어가 이유가 무엇입니까? 홍경래의 난 때문에 사또 병에 따라 지원병을 떠나겁니다.

이때 홍경래는 스스로를 평서대원수라고 불렀습니다. 작은 체구였지만 다부쳤다고 하고, 나이 마흔에 평안도 용강출신으로 몰락한 양반으로 평민이었습니다. 
일찍이 평양 향시에 합격하고 서울로 올라가 대과에 응시했다가 낙방했습니다. 낙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있지만 서북지방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대동여지도]에 홍경래가 잠간 나오는데 민란의 이유를 조정이 필요할 때는 평안도의 힘을 갖다 쓰면서 지난 400년간 관직에는 항상 소외되었다는 건데 이 말은 사실입니다. 이성계 부터도 북쪽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으면서 그들을 차별한게 맞습니다. 
울분에 찬 홍경래는 각지를 다니며 사람들을 사귀기 시작했는데 가산 땅에서 서자 출신의 인텔리 우군칙과 의기투합합니다. 우군칙 역시 서자로 조선에서 항상 빗겨 있던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대부호였던 이희저를 비롯해서 인근의 부자들, 지식인, 장사들까지 다방면의 사람들을 규합했습니다. 그리고는 무기를 마련하고, 우군칙이 자리잡고 있던 가산의 다복동에 지휘부를 만들어서 민란을 준비했습니다. 당시는 3년째 흉작이고 역병까지 돌면서 유랑자가 많았고, 이들은 세상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습니다. 홍경래의 난은 백성들이 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홧김에 일어난 민란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치밀하게 준비되고, 모의되고, 세력을 갖추고 시작된 반란입니다. 

사람을 지휘부가 형성되고 기본적인 형태를 갖추가 사람을 모으는 거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대부호였던 이희저가 광산 노동자를 구한다고 광고를 내니 굶주린 유랑민들이 알아서 찾아왔습니다. 이들이 초기 봉기의 주력부대입니다. 이정도가 되면 관에서도 어느정도 눈치를 채는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던 때입니다. 본래 순조 12년 1월이 거사일이었는데 계획을 앞당겨 순조 11년 12월 18일, 다복동에서 출정식을 가집니다. 보통 민중봉기가 출정식을 하진 않습니다. 이들은 홍경래를 평서대원군으로 해서 군대조직처럼 움직였던 것입니다. 
우선 홍경래는 평서대원군의 직함으로 관서지방 유력인사들과 자제들, 공사의 노비들에게 격문을 보냅니다. 이 격문은 주로 평안도에 대한 차별, 안동 김씨, 반남 박씨 등 척족들의 득세를 규탄하는 내용이었는데 그 만큼 서북지방이 중앙정부로부터 받았던 괄시가 큽니다.  

이쪽 지방은 상인들이 많습니다. 여기에 상인이 많은 이유도 중앙진출이 어려워서입니다. 상인이다 보니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도 보수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쪽 지방에서 기독교가 매우 크게 발달하게 된 요소가 있습니다. 기독교뿐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사이비성 종교들도 대부분 이쪽 지방에서 나왔습니다. 서북지방 사람들의 주변 환경이 그들을 더욱 종교로 귀속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홍경래 군은 대원수 홍경래, 부원수 김사용, 군사 우군칙, 도총 이희저, 선봉장 홍총각과 이제초가 맡았습니다. 이들이 처음 향한 곳은 가사성인데 소식을 들은 가산 군수 ‘정시’가 말을 타고 돌아다니며 대적을 호소했지만 마을이 텅텅비어 있었습니다. 성으로 돌아와 관속, 나졸을 불렀으나 오히려 이들은 봉기이 오자 완영하여 맞았습니다. 군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가족밖에 없었습니다. 봉기군들은 병부와 인신을 받치고 항서를 쓰라고 했는데 끝까지 거절하고 항거하다가 목이 잘려 죽습니다. 이때 죽은 정시가 홍경래의 난 동안 홍경래의 봉기군에게 유일하게 항거했떤 인물입니다. 나중에 병조판서에 추증됩니다. 정4품에서 정2품으로 굉장히 직급히 많이 올라갔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대령에서 별4개 대장이 된 것입니다. 

정시가 이렇게 높이 평가된 것은 이후 모든 수령들은 모두 도망치거나 투항했기 때문입니다. 선천 부사 김익순 같은 경우는 바로 항서를 바치고 성문을 열어 정중하게 봉기군을 맞았고, 대청에서 술까지 대접했습니다. 철산 부사 이장겸 역시 마찬자기로, 이후 홍경래 군의 돈과 쌀 관리를 맡았습니다. 봉기군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며칠만에 싸움 한번 없이 8개 고을을 접수했습니다. 그러니 규모도 커지고 사기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러면서 홍경래군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큰 싸움을 앞두게 됩니다. 바로 안주성과 평양성인데 이때 의견이 갈립니다. 안주성은 정묘호란때 후금군을 상대로 최후항전을 벌인 곳입니다. 이때 후금도 쉽게 함락하지 못한 곳입니다. 그래서 안주성을 점령하고 평양성으로 가자는 의견과, 안주성은 큰 성이니 신중해야 한다는 신중론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신중론이 우세해지면서 안주성 공격을 지체하게 되는데 이게 큰 실수입니다. 시간은 보통 관군의 편입니다. 지체하는 사이에 별서 응원군이 도착하고 지휘부가 새로 꾸려지면서 대오를 갖추게 됩니다. 조선 군대가 아무리 우습다 한들 정규군과 농민군은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들판에서 봉기군과 관군이 만났는데 처음에는 봉기군이 제법 우세했지만 관군이 후미를 치자 곧 무너집니다. 그러니까 관군은 전략과 전법을 가지고 싸운 겁니다. 

봉기군은 본거지인 다복동까지 도망을 가게되고, 그곳에서 홍경래의 가족까지 데리고 다시 정주성에 들어갑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이때 정주성에 라온이도 있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때 봉기군은 평양성을 치기 위해서 출진한 팀 외에 북쪽 의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출친한 팀도 있었습니다. 이들 역시 처음에는 곽산, 철산, 용천을 접수하며 기세좋게 북상했는데 봉기군의 패배 소식을 듣습니다. 이들이 군을 나눠서 의주성을 간 것은 대단한 배짱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평양성을 점령하고 한양까지 내려가겠다는 의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북쪽을 완전히 점령하겠다는 목적으로 군을 나눈 것입니다. 그만큼 자신이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평양팀이 관군에게 패했다는 소식에 의주팀이 위축되고 그때 관군의 공격을 받아 무참하게 패배합니다. 여기서 살아남은 일부도 역시 정주성으로 합류합니다. 이때까 홍경래의 난이 시작된지 고작 10여 일 만입니다. 10여 일 만에 정주성에 모두 갇혀 버린 것입니다. 그 주변을 1만여 명의 관군과 의병이 포위했습니다. 성 안에 있던 봉기군은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쳐도 1만이 안되는 숫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봉기군들이 결기가 대단합니다. 보통 이렇게 되면 내분도 일어나고, 백성들을 못모르고 뛰어들었을 수 있기 때문에 이탈자도 생긱기 마련인데 굉장히 완강했습니다. 봉기군에 속한 사람들은 대부분 더 떨어질 곳이 없던 사람들입니다. 유량민들이 많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땅에서, 이 제도 위에서는 더 이상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홍경래의 나타나서 위험하지만 한 줄기 희망을 보여준 것입니다. 차별없는 세상. 그리고 10여일간 정말로 그런 날들을 맛보았습니다. 평소에는 감히 처다보기도 힘들던 관리들이 쥐새끼처럼 도망치고, 자기들을 무서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었기에 비록 정주성에 몰아 넣었지만 관군이 몇 차례 공격해도 번번히 실패했습니다. 

조정은 우선 정주성을 고립하는데 힘씁니다. 그러면서 순조는 위무책을 수차례 발표합니다. 그 내용이 ‘관서 지방의 옛 환곡을 일체 탕감하고, 군포 징수도 중지하란느 것. 전헌도 풍년이 들 때까지 경감하거나 중지하라’는 것입니다. 



새로 부임하게 된 평안감사 정만석을 청렴하고 검약으로 백성을 넉넉하게 하면서 인심을 수습했습니다. 이럴 때 평안감사가 이상한 사람이 오면 큰일일텐데 정만석이 아주 잘했습니다. 

이쯤되자 정주성의 지도부도 초조해집니다. 무엇보다 식량이 없는게 문제입니다. 석천이나 곽산은 곡식이 풍부하기에 그곳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합니다. 이를 위해 반군은 성문을 열고 나와 기습하는 작전을 감행하지만 실패합니다. 보름 동안 세 차례 기습했지만 150여명의 사상자만 냈습니다. 사기가 꺽일만한데 정주성의 완강함은 여전했습니다. 시지어 성마루에서 기생을 데리고 풍악을 올리는 심리전까지 보입니다. 

곧 지리멸렬할 줄 알았는데 관군은 공성전으로는 힘들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름에 걸쳐서 땅을 팝니다. 그리고 순조 12년 4월 북문 아래까지 땅을 파서 굴을 만들고 그 안에 1800근의 화약을 쌓아서 터트리자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이때가 봉기 후 4개월 정도 흘렀을 때입니다. 

이때는 관군과 의병도 4개월에 걸친 야영과 전투로 악이 받칠 대로 받친 상태였습니다. 성벽이 무너지자 이들이 성으로 들어와 성안 사람들을 살육하기 시작합니다. 홍경래는 탄환에 맞아 죽었고, 용맹을 자랑하던 홍총각은 사로자혔고, 김창시, 이희저 등도 그렇게 죽었습니다. 조선을 떠들썩하게 한 홍경래의 난은 이렇게 평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