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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깊이10

[구르미 그린 달빛] 김유정(라온이)의 아버지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홍경래의 난 3편]




                      



조선을 떠들썩하게 한 홍경래의 난은 이렇게 평정되었습니다. 대부분 죽고 생포된 사람이 2983명입니다. 그런데 이중에 여자와 10세 이하의 아이를 제외하고 1917명이 참수당합니다. 그렇게 정주성은 비로 물들었습니다. 
그런데 홍경래 난이 평정되고 성 안을 살펴보고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관아의 건물들을 비롯해서 사당, 항교 등이 온전한 것입니다. 보통 영화나 드라마 보면 폭도들은 불먼저 냅니다. 그런데 이들은 단수한 폭도가 아니었습니다. 

홍경래의 난은 평민 출신이 일으켰고, 그 대부분의 사람들이 밑바닥 백성이었기에 말 그대로 민란입니다. 

왕이있고, 그 아래 사대부가있어 나라와 백성들을 다스리는게 당연하고, 백성은 그저 열심히 일해 나라에 바치고, 아무리 억울해도 참고 견디는 게 당연한 수백년 질서에 커다라 파열구가 난 것이다. 

그런데 사실 홍경래의 격문을 보면 조선의 근간인 왕조체제와 신분제, 유교질서에 대해서 문제삼고 있지 않습니다. 

1. 관서지역 차별에 대한 분노
2. 척족의 득세비판

격문에는 대안도 거론되지 않고 있습니다. 조선사회를 대체할 비전이 없던 것입니다. 당시 실학자들과  비판적 지식인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세장을 바꾼다 해도 공자님 말씀을 거스를 순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은 [정감록]같은 예언 사상에 호흥하거나 신 앞에 서나 평등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홍경래의 난 이후 에피소드

1. 정주성이  함락되기 전인 2월, 서울에서는 유한순이란느 이가 포교의 기찰에 걸렸습니다. 잡고 보니 홍경래 측의 서울 정보원. 곳곳에서 민심을 선동하는 것이 목적. 아마 같은 역할을 하던 사람들이 더 있었을 것입니다. 홍경래와의 연관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때를 틈타 서울에서는 박종일 등이 거사를 도모하다가 발각. 

2. 봉기 후 보여준 수령들의 태도가 큰 충격을 줬습니다. 8고을이 함락되었는데 가산 군수 제외하곤 모두 자발성 항복. 그 중에 5명은 도망. 도망친 이 중에 한 명이 태천 현감 유정양입니다. 평정된 뒤에 돌아온 그는 낯선 이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역도로 몰아 41명을 죽였습니다. 이 일은 6년이 지난 후에 평안 감사 이조원의 상소로 들어났는데 조정이 그에게 내린 처분은 유배가 고작입니다. 

3. 김병원이라는 선비가 강원도 향시에 나가 장원을 했습니다. 이때 시험 ‘시제’가 ‘홍가의 난 때 적도에게 투항한 선천 부사 김익순을 논하는 것’이었습니다. 김익순은 바로 투항하고 대청에서 술을 대접했던 인물입니다. 김병연의 증조부였던 것입니다. 이에 충격을  받고 김병연은 집을 떠나 방랑하며 평생을 삿갓을 쓰고 살아서 김삿갓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합니다. 이 드라마에서는 ‘김병연’이 나오는데 김병원을 모델로 햇는지 몰랐습니다.  본래 명온공주인데 ‘명은’공주인 것처럼 말입니다. 

봉기군의 이름난 장수인 홍총각과 우군칙은 서울로 압송돼 조사를 받고 능지처참되었습니다. 이때 조각난 홍총각의 시신에 접근하는 모자가 있었는데 바로 의병장 허항의 부인과 아들이었습니다. 허항은 의병을 일으켜 의주로 향하는 봉기군을 패퇴시키는데 크게 기여했고 이후로도 계속 관군과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홍총각이 정주성을 나와 기습했을 때 앞장 서서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허항의 부인과 아들이 홍총각의 배를 갈라 간을 꺼내서 허항의 무덤에 찾아 바쳤습니다. 복수를 마무리한 부인은 곡기를 끊어 남편의 뒤를 따랐습니다. 순조는 탁월한 정절이라며 칭찬하고 이 부분을 모범으로 풍속을 바로 잡고 세상을 격려하게 하라 했습니다. 

[열녀의 탄생]에 보면 조선시대 여성들이 유교 이데올로기 때문에 얼마나 참혹했는지 알수 있는데 외부의 강압도 있지만 내적인 자기 복좀이 더 강했습니다. 
홍경래의 난은 이후 민란의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813년 제주도에서 민란이 있었고, 1815년 경기도 용인에서 민란이 있었는데 이때 이웅길은 홍경래의 난을 본받아 고을을 점령하고 교두보로 삼은 다음 서울을 공략한다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1816년에 평안도 성천에서는 학상이라는 자가 거사했는데 홍경래의 남은 부대라고 자칭했습니다. 
1926년에는 청주에서 김치규가 홍경래가 살아있다는 풍문을 퍼뜨리면서 반란을 주도했습니다. 홍경래의 난은 민란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지식층의 선동으로 참여했던 민중들이 이제는 스스로 주체가 되어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고 그 결과 조선시대 가장 큰 민란인 1862년의 임술민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때를 배경으로한 영화가 [군도 : 민란의 시대]입니다.   
효명이 1827년부터 대리청정을 시작했습니다. 아마 드라마는 김치규가 홍경래와 관련된 풍문을 퍼뜨리는 시점을 소재로 삼았다고 생각합니다. 드라마에서 계속 홍경래가 언급되는 것은 매우 신빙성 있는 내용입니다. 

반란때 마다 홍경래의 이름이 계속 들먹여 지는 것은 홍경래와 100여일 정주성 투쟁이 백성들의 마음에 전설로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