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에 세자가 되고, 열 네 살에 어머니가 사약을 받아죽고, 19년 동안 불안과 긴장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노론 세력은 처음부터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 실수만 한번 해보라는 식으로 폐세자 시킬 흠만 찾으려는 사람들 틈 속에서 드디어 이윤이 왕이 되었습니다. 조선 20대 임금 경종입니다.
작은 세력이지만 소론이 있었기에 이렇게나마 왕이 됐습니다. 그러나 경종이 왕이 됐을 때는 모든 것이 노론 천하였습니다. 임금만 빼고 모두가 노론의 사람들입니다. 비변사, 육조, 승정원, 삼사, 심지어 성균관과 사학, 내시와 궁녀들까지 모두 노론의 사람들. 더군다나 노론이 볼 때 경종이 대단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소심하고, 배포도 없고.
노론의 이런 태도를 보여주는 첫 번 째 사건이 경종이 즉위하고 한달 정도 됐을 때입니다. 조중우라 선비가 ‘생모의 작호를 바로 잡으라’고 상소를 올립니다. 우리가 지금은 그냥 희빈 장씨라고 부르지만 당시는 그냥 죄인 장씨입니다. 폐비 장씨입니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 작호를 바로 잡으라는 상소에 경종은 바로 응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런데 참았습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상소한 조중우를 변방으로 유배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때 노론들이 들고 일어나서 유배로 끝나면 안되고 국문을 열어야 한다고 주청합니다. 결국 조중우는 국문중에 죽습니다.
심지어 노론 윤지술이 왕에게 판부사 이이명이 올린 글을 보니 신사년의 일(장희빈 사사)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며 바로 기록하게 하라고 왕에게 상소합니다. 이이명은 노론 대신입니다. 이이명도 장희빈을 죽이는데 동참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대신도 너무 예민한 일이기에 눈치를 보고 피해간 건데 지금 신하가 임금에게 너무 노골적으로 어머니의 죽음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마땅히 죽었어야 하는 일인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왕도 이때는 화가나서 윤지술을 유배보냈는데 사헌부와 성균관, 사학의 유생들까지 모두 들고 일어나서 왕이 윤지술을 풀어줍니다. 이게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노론들은 한발 더나아가 거의 왕을 왕으로 보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당시 왕이 아들이 없었는데 그 동생인 연잉군을 세제로 세우라고 주청을 올린 겁니다.
보위에 오른지 겨우1년, 나이는 34살, 중전은 겨우 17살입니다. 아들이 없더라도 이렇게 말해서는 안되는 거죠. 왕이 대신들과 의논하겠다고 했는데 그날 밤 노론 위주의 대신들이 모여 왕을 찾아서 압박합니다. 결국 왕이 허락합니다. 그런데 신하들이 여기서 하나 더 요구하는 것이 대비전에 들어가서 지금 결정에 대해서 싸인을 받아 오라는 것입니다.
지금 경종은 서른 살이 넘은 왕입니다. 대리청정이 아닙니다. 왕이 정하면 끝인데 대비에게 서명을 받아오라는 것 자체가 모욕적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왕이 나중에 다른 말을 못하게하거나, 오히려 이 일이 자기들에게 빌미가 도지 않게 하려는 처사였을 겁니다.
물론 모든 신하가 노론의 뜻대로 따른 것은 아닙니다. 소론의 유봉휘가 절차상의 문제와 신하들의 무례를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오히려 유봉휘가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노론들은 한 걸음 더 들어가서 말도 안되는 무리수를 두게 됩니다. 세제 책봉된지 15일 만에 당시 노론의 우두머리격인 김창집과 이이명의 뜻에 따라 조성복이 상소를 올립니다. 왕에게 정사를 세제에게 대리청정시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대리청정을 감히 신하가 요청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왕이 대리청정을 한다고 해도 말려야 하는데 이것은 거의 역모수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이 경종의 한 수입니다. 이것이 우연인지 계획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경종의 즉각적인 한수, 그 청을 즉각 수용한다는 비망기를 내립니다. 비망기는 임금이 명령이나 의견을 적어서 승지에게 전하던 문서인데 이것은 소론뿐 아니라 일을 이렇게 진행하려고 했던 노론들까지도 깜짝 놀랄 일입니다. 시간을 조금씩 끌고 분위기를 만들어서 자연스럽게 가려고 했는데 왕이 대놓고 수용한다는 비망기를 내린 겁니다.
그러자 승지들이 먼저 조성복의 처벌과 비망기 회수를 청하고, 좌참찬 최석항이 늦은 밤에 입궐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명을 거두시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경종이 또 선선히 명을 거둡니다.
그러자 분위기가 왕에게 비망기를 거두라고 청하지 않은 노론, 삼사가 난처한 상호아이 됐습니다. 이 사건을 기회로 소론들이 노론들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노론들도 자신들의 상황이 위험하다 것을 알고 사생결단식으로 대응을 합니다. 그러자 조정이 시끄러워 졌습니다. 이때 왕이 다시 비망기를 내립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소론뿐 아니라 노론까지도 반대하고, 세제도 반대하면서 연일 명을 거둬다라고 주청합니다. 그런데 왕이 너무 확고합니다. 그러니까 노론들도 ‘전하의 뜻이 그러하다면...’이라면서 정청을 그만 두기로 합니다. ‘정청’은 궁에서 왕에게 보고하고 그 명령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왕은 어떤 말도 안했잖아요. 그런데 정청을 끝낸 겁니다. 그들의 속내가 너무 환히 보입니다.
이때 늦은 밤 우의정 조태구가 왕에게 달려옵니다. 그런데 도승지 홍계적이 아예 만나지도 못하게 합니다. 양사는 조태구의 유배를 청합니다. 노론은 이젠 다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왕이 갑자기 우상을 들라고 합니다. 그러자 노론 4대신을 비롯해서 다시 신하들이 입궐을 하는데 신하들과 모두 만난 자리에서 우의정 조태구를 비롯한 신하들이 울면서 명을 거둬달라고 청합니다. 정적이 흘렀을 거비다. 그리고 왕이 그 경들의 뜻이 그렇다면 명을 거두겠다고 말합니다.
너무 큰 사건이 갑자기 벌어졌다가 갑자기 끝난 것입니다. 노론은 또 다시 입장이 난처해 졌습니다. 그런데 소론도 문제를 더 이상 크게 벌이면 안된다 싶었는지 조용했습니다. 그렇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는 듯 50일이 지난 경종 1년 12월 6일 김일경을 필두로 박필몽, 이명의, 이진유, 윤성시, 정해, 서종하가 연명한 상조가 올라옵니다. 소위 이 상소를 ‘김일경의 상소’라고 부릅니다.
상소의 내용은 한마디로 삼강오륜 중에 군위신강, 군신유의가 있는데 조성복 이하 노론의 4대신들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가 흉적으로 충성스럽지 못하고, 승정원과 삼사가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그렇게 소심하고 조심했던 경종이 이때는 매우 단호하게 이 상소를 받아들여 승지와 삼사를 모두 삭출하고, 훈련대장과 군영의 장수들 뿐 아니라 영의정과 좌의정을 체직하고 조태구를 비롯한 경종의 사람들을 모두 요직에 않혔습니다. 하루아침에 천하가 바뀐 것입니다.
경종이 정말로 1년 만에 실권을 회복했습니다. 대단합니다. 오늘 제가 경종을 추모하면서 그를 소개하는 이유는 이런 경종의 모습이나 권력을 잡는 과정때문이 아닙니다.
본래 지금까지의 왕실 역사를 보면 이쯤되면 경종과 경종의 신하들이 다음으로 할 일은 세제를 내쫓거나 숙청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숙청할 수 있는 기회도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경종을 죽이려고 하는 음모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세제를 왕으로 추대할 계획이었습니다. 실제로 조선역사에서 종친은 역모에 이름만 올라와도 죽었던 것이 현실인데 이때는 충분히 역모와 세제를 연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종이 그러지 않았습니다.
사실 연산군의 예를 보면, 세제가 문제가 아니라 복수할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14살 때부터 얼마나 설움을 많이 당했습니까? 연산군도 중종을 죽이지 않았느데 중종은 왕 앞에서 벌벌 떨었습니다. 그런데 연잉군은 사실 왕이 볼 때 굉장히 건방진 행동, 투쟁들도 많이 했습니다.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것이 역사의 증언입니다.
그런데 경종은 동생은 건드리지 않았고, 역모사건도 중간에 덮었습니다. 왜냐하면 파고들면 결국 세제까지 나오는 것이 너무 뻔하기 때문입니다. 훗날 영조가 ‘황형의 우애가 아니었다면 내가 어찌 오늘을 볼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했는데 그건 진심일 겁니다. 개인적인 감정보다는 왕실을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왕실에 경종과 세제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경종 3년 여름, 몇 달 크게 아팠던 왕이 이듬해 여름 다시 병석에 누웠습니다.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있을 때 ‘게장과 생감’을 올렸는데 모처럼 잘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복통과 설사로 몸이 더 안좋아집니다. 그러자 세제와 신하들이 모두 달려왔습니다. 이때 세제가 평생 따라다니는 오명, 형을 독살했다는 의심쩍은 행동을 합니다. 어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삼을 올리게 한 것입니다. 그러자 잠시 안정되는 듯 하더니 갑자기 호흡이 미약해 지면서 새벽녘에 눈을 감습니다. 재위 4년, 10월 11일 오늘입니다. 향년 37세였습니다.
경종을 이은 영조와 정조의 시대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증흥기입니다. 조선의 역사는 정조, 순조 이후 왕실이 힘을 잃으면서 제 역할을 못합니다. 아마 경종이 영조를 죽였다면 후사문제로 왕실은 일대 혼란이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의 역사가 더 많이 후퇴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경종은 비로 4년 밖에 재위에 있지 않았고, 크게 뜻을 펼치진 못했지만 연산군의 전철을 밟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경종은 연산군때보다 더 복수의 꺼리가 많았습니다. 연산군은 어머니의 얼구롣 모르지만 경종은 14살 때까지 어머니와 함께 있었습니다. 눈 앞에서 어머니가 사약을 받는 것을 직접 보았고, 신하들에게 대놓고 모욕했습니다. 연산군때는 신하들이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연산군은 그런 광기를 보인 겁니다.
그러나 경종은 연산의 길을 걷지 않고, 오히려 조선의 왕으로서 왕실과 더 큰 것을 걱정하고 생각했다고 여겨집니다. 이런 면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스토리에 가려져 있던 경종의 삶은 충분히 추모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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