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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깊이10

패러다임쉬프트 신석기 혁명, 역사 이전의 시대 part 2[세계의 역사1]








구석기 문화


보통 문자를 기준으로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구분합니다. BC 3000년 이전시대인데 이런 구분은 사실 지역마다 다릅니다. 최초의 문자를 BC 3000년 경 수메르인들이 만들었다고 하니까 3000년인 것 뿐입니다. 인류사의 99%는 선사시대이고 인류의 우리의 역사를 거의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문자로 된 기록이 없기에 선사시대의 문화를 알 수 있는 길은 당시의 도구, 무기 및 그 밖의 유물, 유적에 의존할 수 밖에 없지만 그것도 확실한 건 아닙니다. 


선사시대는 신석기와 구석기로 나뉩니다. 구석기는 약1만년 전까지로 구석기인들을 주로 수렵과 채집을 하였고, 그러다 보니 일정한 거주지 없이 먹을 것을 찾아 계속해서 이동했습니다. 이들이 사용한 최초의 도구는 돌이었는데 돌을 손에 쥐기 좋게 깨뜨려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뗀석기’라고 하는데 사냥 후 껍질을 벗기거나 무언가를 자를 때도 사용했습니다. 인류는 다른 동물과 달리 손을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창날, 화살촉, 작살, 낚시바늘 등과 같은 더욱 정교한 도구들을 만들었습니다. 구석기 인들은 이처럼 정교한 도구들과 뗀석기, 짐승의 뼈나 뿔, 엄니로 만든 골각기를 이용해 채집, 어로, 수렵 활동을 했지만 아직 문자가 발명되기 전이라 어렵게 습득한 지식과 기술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되어 내려가는데 한계가 있었고 그만큼 발전속도가 늦었습니다. 

 

구석기인들은 사람들이 힘을모아 사냥을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불을 사용하면서 더욱 생존력이 강해졌습니다. 불은 음식을 구워먹는 용도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짐승들로 부터 생명을 보존하는 용도로도 사용했고 추운 빙하기가 닥쳐왔을 때도 인류가 살아남을 수있게 해줬습니다. 그래서 불씨 보관이 매우 중요했을 뿐만 아니라 신격화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때까지 인류는 불을 피우지는 못했고 번개와 용암에서 불을 얻었을 뿐입니다. 구석기인들은 동굴이나 간단한 움막에서 살았고 최소한의 옷만 걸치고 지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후기 구석기로 가면 인류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믿음과 상상을 가지고 예술적 창의성을 보이며 종교적 의식을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상을 조각하고, 사냥하는 광경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시체를 매장하여 죽음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대표적인 것이 [알타미라 동굴벽화]로 구석기시대 동굴 예술의 최고 절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벽화들은 깊은 동굴 안에 있어서 외부 기후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잘 보존되었고 구석기인들이 가지고 있던 인간의 창조적인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예술작품입니다. 또 이 벽화들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다산과 풍요,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감정이 담긴 벽화와 유물을 남겼습니다. 그 밖에도 오스트리아에서 발견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과 [라스코 동굴벽화]있습니다. 


1909년 오스트리아 다뉴브 강가의 빌렌도르프에서 철도 공사를 하던 중 발견된 유물. 여성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이 유물에서 가장 특징적인 점은 유방과 복부, 둔부의 과장된 표현으로 출산을 상징하는 원시적인 주술의 도구, 혹은 숭배의 대상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프랑스의 도르도뉴 지방에 있는 동굴의 벽화로, 1940년에 발견된 구석기 시대의 유적이다. 이 벽화에는 사냥의 성공과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보고 있다. 




신석기 문화


구석기는 1만년 전에 끝나고 인류는 간석기와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를 신석기 시대라고 하는데 예전에 개봉했던 영화 중에 [10,000 BC]라고 있는데 제목이 굳이 10,000인 것은 보통 10,000년이 구석기와 신석기를 나누는 연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석시시대 사람들은 기후 조건에 맞추어 살 곳을 정하고, 사냥과 고기잡이를 계속하는 한편 가축을 사육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인류가 자연을 이용하여 스스로 식량을 생산하는 생산경제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면 더 이상 유랑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착이 가능해 진 것입니다. 이것이 ‘신석기 혁명’입니다. 농업혁명이라고도 부릅니다. 농업은 수렵이나 채취에 비해 생산력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구를 부양하고 잉여식량을 비축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석기와 구분되는 신석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인류는 가축뿐 아니라 식물을 기르는 방법도 알게 되어 농경생활을 시작하고, 그러다 보니 경작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마을이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씨족사회가 형성된 것인데 씨족은 같은 조상에서 나온 일족으로 제일 먼저 형성되기 쉬운 집단입니다. [10,000 BC]도 씨족 중심의 부족사회 배경입니다. 


이 시대의 연장은 더욱 정교하고 예리하게 만든 간석기가 사용됩니다. 도끼를 비롯해서 괭이, 가래, 호미, 낫, 칼 등 농기용 간석기와 맷돌, 절구 등 농산물의 가공에 쓰이는 도구가 사용되었고, 곡식을 저장하거나 음식을 끓이는 데 토기가 이용되었습니다. 


또 베틀과 북을 발명하여 아마나 양모를 원료로 옷을 짜 입기도 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동물의 가죽 등을 몸에 걸치는 것이 고작이었다면 이제는 몸에 딱 맞는 옷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 신석기 시대의 중요한 것은 인간이 불을 피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찰을 통해 불을 피우게 된 것이 구석기와 비교해서 대단히 발전된 것입니다.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동굴에서 나와 나무와 진흙 말린 것을 이용해 움막을 짓거나 인위적으로 굴을 파서 집으로 삼았습니다. 


[10,000 BC]를 보면 부족과 부족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사람을 잡아 노예로 부리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농경을 위해 공동 작업을 하면서도 외부 세력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서로 힘을 모았습니다.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이 시대는 개인소유가 없이 모든 것은 공동체의 소유로 서로 공평하게 나눴다고 합니다. 마을의 중요한 일을 부족회의를 통해 결정했고, 여기서 부족장도 선출했습니다. 


각 마을마다 외침과 약탈을 대비해 울타리와 망루를 세우고, 성벽을 쌓기도 했으며 공동의 적을 대처하기 위해서 마을 간에 동맹을 맺기도하고, 제일 강한 마을을 중심으로 주변의 마을들이 힘을 합치기도 했습니다. 


구석기에 비해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이동 범위가 매우 넓어서 배나 뗏목을 만들어 강과 바다를 항해도 했는데 인류는 신석기 시대를 거치는 동안 지구상의 여러 지역으로 퍼저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신석기 시대가 발전의 양상을 보인 것은 씨족 사회가 발달했기 때문인데 그럴수록 강한 부족장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여러 마을이 공동으로 건설한 대규모의 신전, 성벽까지 갖춘 견고한 요새, 화려한 장식품 등이 함께 묻혀 있는 커다란 무덤, 고인돌, 선돌 등과 같은 거석 기념물 등은 신석기 시대 후기와 청동기 시대 초기의 강력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주변의 마을들이 통합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대표적으로 영국 월트셔주 솔즈베리 평원에 있는 [스톤 헨지]입니다. 하나의 무개가 50톤인 이 돌들을 어디서 어떻게 가져왔는지는 더이상 미스테리는 아니지만 엄청난 유적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유적지는 유력한 지도자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고, 태양 숭배의 종교 의식과 연관이 있다는 설도, 혹은 천체 관측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신석시 시대의 종교는 태양과 거석의 숭배로 표현되었는데 사람들은 물, 구름, 번개, 천둥, 삼림, 수목 등에 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뜻밖의 재난이나 흉작, 질병도 규범을 어겼기 때문에 신들이 내린 벌로 여겼는데, 신석기인들을 재난을 피하고, 다산과 풍요를 보장받기 위해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신석시 시대의 술, 춤, 음악, 조각, 그림, 각종 장신구 등도 신들을 위한 제사와 관련되어 발전했고, 이처럼 종교의 영역이 커지자 신들과 영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무당의 역할이 점차 확대되게 됩니다. 


신석기 시대에는 씨족이 발달하면서도 씨족 외의 사람들과 결혼을 하는 족외혼 제도와 일부일처제가 점차 자리잡게 됩니다. 


흔히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를 모두 석기시대라고 부르나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구석기 시대에는 인간이 동물과 거의 구별되지 못한 반면, 신석기 시대에는 독창적인 생활을 영위하였고, 매우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신석기 혁명으로 사람들은 잉여식량을 비축할 수 있게 되었고, 유랑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자연히 농경지 부근에 취락이 형성되었고, 취락이 커져 도시가 형성되었습니다. 식성기 농업혁명으로 인한 잉여식량은 식량생산에 집적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계층을 형성시켰습니다. 그리고 사회의 분업화가 시작되어 기술자나 장인, 상인, 군인, 관리, 제사장 같은 새로운 계층이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류는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더욱 땅에 의존하게 되었고 식량의 생산은 인간의 경제생활뿐 아니라 사회와 문화까지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회적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땅을 많이 소유한 만큼 사회 계급이 나뉘어졌고, 가족적 진단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문화적으로도 농경, 거장, 주거 등을 향상시키는 도구 제작이나 기술 개선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인간은 자연 환경에 순응하여 살기보다는 어떠한 작업을 통해 계획적으로 환경을 바꾸어 놓으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이런 토대 위에서 인류의 문명이 태동됩니다.